바야흐로 11월도 하순이다. 며칠간 온화했던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북쪽 시베리아의 차가운 기류가 남하하여 바야흐로 지금이 겨울로 가는 길목임을 깨우쳐준다. 봄의 꽃이 아무리 화려해도, 여름의 초록이 아무리 무성해도 조락의 가을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올해도 유난히 더운 한해였다. 환경론자들이 얘기하는 기후온난화로 지구가 갈수록 뜨거워지고 따뜻해졌다. 11월 초에만 해도 늦여름처럼 따뜻한 날씨가 계속되어 사람들은 반팔 옷을 입고 다니기도 했고 가로수들의 잎도 미쳐 단풍옷을 입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어느새 겨울은 성큼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다 보니 올해의 단풍은 색깔이 다소 칙칙하다. 아직도 길가의 플라타너스는 녹색과 갈색을 공유하고 있다.
가을이 깊어진다는 것은 한해가 거의 끝나간다는 것이다. 벽의 칼렌다도 마지막 한두장만을 남기며 앙상하게 걸려있고 책상위의 업무용 다이어리 세월의 때를 잔뜩 안고 용도폐기될 시간을 기다리는 것 같다. 모든 것이 끝나가고 있고 내 인생 역시 종점을 향해 달려 가는 마지막 열차같다.
옛날 인도에서는 인생을 크게 4개의 단계로 나누었다고 한다. 학생기, 가주기, 임주기, 유행기가 그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를 성장기, 가주기, 임주기 (유행기 포함) 등 3단계로 나누고 싶다. 과거 우리네 인생을 60세로 보면, 태어나서 20세까지는 성장하고 배우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주로 부모님의 조력으로 양육되고 교육을 받아서 다음 시기에 독립해서 가정을 이루고 사회활동을 하기 위해 준비한다. 다음은 가주기로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며 사회 구성원의 일원으로 경제활동을 하고 여기서 소득을 얻어 2세를 양육하고 가족을 부양하는 시기이다. 이 역시 20년이다. 마지막은 임주기로 자녀 양육과 경제활동을 접고 숲으로 들어가 고용히 자신을 성찰하고 수도하며 내생을 준비하는 시기라고 한다.
지금은 의학의 발달과 영양상태 개선으로 인하여 우리의 수명이 거의 90세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결혼도 거의 30세 정도에 하였고 퇴직은 거의 60세에 하니 3단계 이론은 30년 주기로 보면 되겠다. 이렇게 내 인생을 이 주기에 넣어 보아도 나는 세상의 모든 사회생활을 접고 산으로 들어가서 소위 입산수도 해야 할 나이를 훨씬 지난 셈이 된다.
임주기는 계절로 치면 가을과 겨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사바세계의 번잡함을 벗어나 세상을 관조하고 인생의 의미와 우주의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 시기에 나는 아직도 생업의 현장에서 몇푼의 이익을 위해 동분서주 한다. 출근길의 끼어들기하는 다른 차에게 짜증을 내고 어느 덜떨어진 정치가의 막말에 분노하고 지구 서쪽 저편의 전쟁에 관심이 많다. 애초에 임주기와는 거리가 먼 인생이다.
어느 수필가는 곱게 물든 단풍은 신록보다도 아름답다고 했다. 하지만 칙칙하게 말라 비틀어진 낙엽을 신록에 견준다는 것 자체가 노욕이다. 신록의 영롱하고 상큼한 색감을 가을 단풍이 능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늘은 진회색으로 무겁게 가라 앉았고 차가운 북풍이 매섭게 몰아 치고 있다. 지난 계절 왕성했던 생명들을 한순간에 얼어 붙게하고 죽음으로 몰아 간다.
내 인생의 가을,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의 다크서클, 눈가의 잔주름과 뺨위의 검버섯, 목의 겹주름과 돋아난 쥐젖. 누가 봐도 곱게 물든 단풍이 아니다. 아, 인생의 황혼이여! 몰아치는 북풍과 함께 더 이상 추한 모습을 보이기 전에 사라져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