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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미학

aspakang 2021. 9. 16. 14:19

이순의 중반을 넘어서니 간간이 친구들과 동료들의 부고가 날아들기 시작한다.  아직까지 친밀하게 우정을 나누어 온 친구들의 죽음은 맞이하지 않았지만 걔중에는 병원신세를 지고 있는 친구도 있다.

 

가깝게 지내는 친구말이 "한국남자의 평균수명이 2019년 기준 80.3세라고 한다. 그러니 65세에서 75세 사이에 한국남자의 절반이 죽는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대략 앞으로 10년 정도 사이에 동년배의 친구 중에 절반을 잃는다. 친구들과 만나면 누가 큰 수술을 했고 누가 치료차 낙향하여 요양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들린다. 그러니 우리 대화의 주제는 건강이 대세다.

 

유사이래로 인간의 수명은 꾸준히 길어졌다는 것은 멀리 갈 필요도 없이 간난의 시대를 살아 온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우리네 아버지 세대 보다 우리는 적어도 15년 이상은 오래 살고 있는데도 우리세대의 사람들은 더 긴 젊음과 더 늘어난 수명을 기대하며 조금이라도 건강하게 더 오래살고자 발버둥친다.

 

누구나 건강과 죽음에 대해 얘기하지만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마도 죽음이란 주제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싶지 않거나 아니면 죽음에 대해 준비하고 있지 않아서 일 것이다. 평균수명이란 것은 따지고 보면 모든 죽음을 합산하여 단순평균을 낸 것이므로 개인에 따라 그 시기는 다르며 노년층에 이른 우리에게는 언제든지 찾아 올 수 있는 불청객이다. 출생은 본인이 준비할 수 없지만 죽음은 본인이 준비하고 대비해야 한다.

 

사실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내가 죽어야지, 죽어야지"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막상 죽음이 앞에 닥치면 허둥대고 불안해 하면서 병원을 찾고 살기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한마디로 죽음의 공포에 떨며 삶에 집요하게 집착한다. 자신의 삶에 자신이 없었던 것처럼 사후세계에도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병원과 요양시설을 오가며 종국에는 중환자실에서 링겔주사기와 산소호흡기를 달고 최후를 맞이한다.

 

이 무슨 찌질하고 허접한 죽음인가? 하루살이는 태어나서 하룻동안 생식과 죽음의 비행을 하고 장렬히 사라지고 사슴도 죽을 때가 되면 조용히 숲속으로 사라져 가쁜 숨을 내쉬며 조용히 죽음을 맞는다. 사자는 이빨과 발톱이 빠지고 없어지면 쓸쓸히 죽음의 계곡으로 내려가 기꺼이 죽음을 맞이한다.

 

이에 비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죽음은 너무나 구차하다. 동물처럼 자기 스스로 먹이를 찾거나 사냥을 할 수 없으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면 비참하겠지만 적어도 죽음에도 미학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죽음에 우아미나 숭고미, 장엄미 같은 것은 없다고 하드래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최소한의 품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과거에 유행했다는 고려장같은 것을 도입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자신의 죽음의 방식을 스스로 결정하여 떠날 때 깔끔하게 떠나야 한다. 적어도 죽음의 결정을 남에게 맞겨서는 안된다.

 

혹자는 우리가 태어날 때 본인만 울고 주위 모든 사람이 웃었다면 죽을 때는 본인은 웃고 주위 모든 사람들이 우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어려운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죽을 때 나 자신만이라도 웃으며 사라질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