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가장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자기 보호본능이 나오는 대뇌 편도체인데 그 모양이 아몬드를 닮아서 아미그달라라고 한다고 들었다. 인간을 포함한 대부분의 동물들에게는 본능적으로 공포심이 엄습하거나 위협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있다. 깜깜한 동굴에 들어가거나 어두운 뒷골목에서 이러한 감정을 느낀다. 이는 생존에 꼭 필요한 것으로 천적이나 위험한 상황을 만나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때 이를 회피하거나 방어하기 위한 동인이 된다.
아미그달라는 대뇌변연계에 위치하여 감정을 조절하고, 공포나 위협에 대한 학습 및 기억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뇌 부위다. 아미그달라는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고 공포를 기억하며 불안한 감정 등을 조절하여 자신을 방어하는 기초적인 기능을 하기에 원시적 두뇌로도 불린다.
동물이나 사람은 공포심이나 불안함을 느끼면 본능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려는 행동을 보이는데 아미그달라에 문제가 생기거나 이를 제거하면 이러한 자기 방어기제가 상실된다. 즉 불안감을 느끼지 못하고 공포심에 마비가 오니까 자신에게 위험이 다가와도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한 대학에서 쥐들의 아미그달라를 마비시키는 실험을 했는데 아미그달라가 마비된 쥐들은 눈앞에 고양이가 있어도 공포심을 느끼지 못했으며 심지어 고양이에게 먹히고 있는 순간에도 미동조차 없었다고 한다. 아미그달라로 인한 개체보존 본능이 작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뇌 속의 아미그달라는 생존을 지키기 위한 본능이자 공포심을 느끼는 중추이다. 공포심을 느끼지 않고 불안하지 않으면 방어하지 않게 된다. 아미그달라는 사람이나 동물의 생존에 없어서는 필수적이다. 아미그달라는 항상 내편과 적을 구분해 두뇌전체에 전달한다.
한편 아미그달라에는 부정적 불안한 요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뇌신경학자들에 따르면 사람은 하루에도 수많은 상황을 겪게 되는데 아미그달라는 이런 상황을 생존이라는 관점에서 유쾌와 불쾌로 나누어 분류한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자기를 인정하여 칭찬해주고 높여주면 유쾌로 분류한다.
반대로 자신을 멸시하거나 무시하는 혹은 위험을 당하거나 불안을 주는 상황에서는 바로 불쾌로 분류해 분노나 공포 등의 부정적 감정을 일으켜 자기방어에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불쾌로 분류된 사람은 잠재적인 적으로 인식되어 기피하게 된다. 첫 눈에 불쾌한 인상을 준 사람이 이유 없이 싫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한다.
아미그달라가 활발하게 작동하게 되면 지나치게 자기 보호 본능이 발동된다. 조그마한 위협에도 크게 반응하여 화를 내거나 공격성을 보이게 된다. 국회에서 자주 보는 여야의원간의 고성이 오가는 언쟁도 그렇고 분노조절 장애로 인한 보복운전 등이 아미그달라의 지나친 활성화로 인한 현상이라고 할 것이다.
한편 아미그달라는 감정을 조절한다. 이 역시 불안감을 느끼는 것에서 기인하는데, 자신에게 유익하거나 긍정적인 행동을 하면 아미그달라는 이를 기분이 좋다고 여긴다. 하지만 자신에게 위협을 가하거나 무시 혹은 멸시를 하면 아미그달라는 이를 불쾌하다고 여기게 된다. 따라서 첫인상에서 불쾌한 상황을 만들게 되면 아미그달라는 그 사람을 자신의 안전을 해치는 ‘적’으로 간주하게 되어 그 후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아도 싫어하게 된다.
제아무리 학식이나 덕망을 갖춘 사람이라도 절망이나 분노 등의 감정에서 해방될 수 없는 게 인간이다. 두뇌과학자들에 따르면, 그런 감정을 못 느낀다면 그건 아미그달라가 고장 난 증거라 한다. 그런데 이런 아미그달라의 정신연령은 5세 수준인데, 두뇌는 5세 이전에 이미 절망, 분노 등의 원시적 감정을 익히기에 그렇단다.
필자는 어느 가까운 지인이 잘 표현했듯이 "비등점이 낮은 인간"이다. 쉽게 흥분하거나 분노하고 또 빨리 식고 진정하는 성격인 것 같다. 아미그달라가 과도히 활성화되어 있는 원시적인 인간인 셈이다. 누구는 이 아미그달라를 도마뱀의 뇌라고도 하니 필자의 전생이 의심스럽기도 하다.
불가에서는 화를 내거나 분노하는 마음을 진심(嗔心)이라 하여 삼독(三毒)심의 하나로 극도로 경계한다. 영적인 각성(불교에서는 이를 대각내지는 본각이라고 한다.)을 이룬 스님들은 거의 성냄이나 비탄등의 감정을 나타내지 않는다. 이들은 이러한 마음이 들때는 이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즉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는구나", "불안한 생각이 드는구나."하고 제삼자적 입장에서 이를 관조한다. 그러면 아미그달라는 바로 식어 버린다.
원시시대에 비해서 훨씬 윤택하고 안전한 삶을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아미그달라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원시의 뇌를 가장 많이 활용하고 있는 우리는 인류가 아닌 파충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