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환갑이다. 내가 태어난지 육십년이 지나 육십갑자를 한바뀌 돌아 다시 정유년을 맞이 하였고 이제 정유년도 저물어 간다.
돌이켜보면 잛지 않았던 시간이다. 육십년대 보릿고개시절, 고향인 경남 김해시 대동면 농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님은 일제말에 사범학교를 나와 교편을 잡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 교직을 그만두고 잠시 쉬었고 르러다가 부산에서 사업을 하는 친척의 회사에 취직을 하였다. 이런 아버지를 따라 큰 누나가 교등학교에 다니며 아버지와 같이 부산에서 살았고 나머지 5형제들은 할머니와 어머님 아래에서 올망졸망 지내며 시골 학교에 다녔다. 우리 집안이 중농 정도라 배를 곯는 일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풍족한 생활은 아니었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우리집 머슴과 함께 종일 논밭에서 지냈고 우리들은 학교에 다녀오면 집안일을 거들었다. 우리집에 오갈데없는 정순이란 식모가 있어서 빨래와 청소등 온갖 뒷치닥거리를 하였지만 집안은 늘 농기계와 농산물, 수확한 곡식등으로 너저분했다. 나와 다섯살 터울 위의 형이 시골 중학교로 진학하고 삼학년 진학반이 되자 소먹이기는 주로 나의 차지가 되었다 가끔싹 나와 두살 터울 위인 누나가 동행하거나 대신해 주기도 하였지만. 소먹이기는 늦봄부터 가을까지로 동네 앞산과 뒷산을 또래의 꼬마들과 어울려 오후내내 헤메다가 어스럼한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내려왔다.
이렇게 소먹이기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아마도 내가 먹인 소가 할머니 환갑잔치에 희생된 소의 새끼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필자가 어린시절을 보낸 60년대만해도 환갑잔치는 결혼잔치 이상으로 큰 잔치였다. 우선 만 60까지 산다는 것은 당시까지는 드문일로 개인적으로는 큰 행운에 속하는 일이었고 만 육십이면 중년의 자녀들이 모두 결혼해서 일가를 이루었음은 물론 이미 많은 손자들을 봐서 슬하에 대가족의 일가를 이루고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이 큰 행사를 허투루 보낸다는 것은 정상적인 가문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우리 아버지도 젊어서 남편을 병으로 떠나 보내고 청상으로 고난의 세월을 살아내신 할머니를 위해서 큰 환갑잔치를 벌였다. 고향동네와 원근의 대소 친척들을 초청한 것은 물론이다.또한 바깥마당에 면사무소에서인지 중학교에서인지에서 빌려 온 큰 차일까지 쳤다. 이러니 인근의 온각 거지들과 상이용사, 장애인들까지 와서 한상 잘 받았다. 이 때 아버지가 집에서 키우던 소를 한마리 잡았는데 동네앞 당산나무 근처 개울가에서 잡은 소를 해체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난다.
그래서 우리집에서는 농우로 쓸 소를 한마리 더 사와서 이를 키워야 했다. 그런데 당시에 인기있었던 영화중에 "성난 송아지"라는 슬픈 영화가 있었는데 그 내용도 주인공 어린이가 송아지를 키우는(당시 우리는 소키우는 것을 소먹인다고 했다.) 이야기였다. 그 당시 가난한 주인공의 집안에서 소를 한마리 구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먼저 부잣집에서 암송아지를 한마리를 얻어 와서 이를 어미소가 될 때까지 키워서 이 소가 새끼를 배고 이 새끼가 태어나면 어미소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그 새끼를 키워준 집에서 가지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을 경상도에서 "소 배내먹이기"라고 했다. 그러니 송아지 한마리를 가지려면 적어도 3년가까이는 주인소를 키워 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자면 소를 키워 준 소년은 학업은 진작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난했던 시절의 슬픈 이야기다.
그런데 "성난 송아지" 영화의 줄거리는 이 배냇 송아지를 당연히 주인공 소년에게 돌려 주어야 함에도 이 송아지마저도 원래 소(애초 송아지였다)주인이 뺏어 가 버린 것이다. 그래서 소년은 청와대로 대통령께 탄원을 하려가서는 기어코 성공해서 송아지를 돌려 받는, 정말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영화였다.
환갑이야기를 하면서 너무 멀리 와 버렸다. 내가 환갑을 맞고 보니 그 옛날 나를 아주 귀여워 해 주었던 할머니가 생각났고 그 할머니의 환갑잔치에 소한마리를 잡아서 대접했던 기억이 떠 올라서 장황히 써 보았다.
이제 우리는 환갑잔치를 하지 않는다. 국민들의 영양상태와 의료써비스가 워낙에 발전하여 인생 60은 다반사가 되었으며 축하받을 일도 아닌 것이 되었다. 그래도 시집간 딸부부가 섭섭하다고 환갑여행을 보내 주겠단다. 격세지감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