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에서는 불교의 기본 가르침은 악을 짓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짧지않은 생을 살면서 악을 모든 악을 짓지 않고 온갖 선한 행위만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아마도 성자를 제외하고 이런 생을 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선이라고 하거나 악이라고 할 때 이를 구분하는 기준이 언제나 분명한 것은 아니다. 절대적인 악이라고 규정하는 행위나 언제나 선이라고 인정하는 일도 경우에 따라서는 선.악이 바뀔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이런 예외적인 경우를 상정해서 얘기할 의도는 없다.
우리가 선.악을 판단하는 잣대는 무엇일까? 많은 철학자와 종교가, 윤리학자들이 규정한 바가 있겠지만 필자는 이 기준에 인간, 사회, 정의, 도덕, 행복등이 포함된다고 본다. 즉, 우리의 의도나 말, 행위가 많은 사람들이나 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경우에 이를 선이라고 규정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의도나 말, 행위가 정의롭거나 정의를 구현하는 행위라면 선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행위가 도덕적이라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며 행복을 증진시키는 일이라면 선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善의 모호성과 상대성을 해결하고자 서구적 전통에서는 최고선의 개념을 도입한 것 같다. 고대 그리스철학에서 최고선은 궁극의 평화, 최상의 목적, 최고의 행복, 신등을 의미하였으나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로 넘어 오면서 촤고의 선은 당연히 신을 의미하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신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되는 도덕적 완전성을 의미하게 돠었다. 하지만 신으로부터의 인간 해방을 부르짖었던 근대에 들어와서는 임마누엘 칸트에 의해서 최고선의 개념이 바뀌었다.
칸트에 의하면 최고선이란 도덕과 행복의 한 마디로 규정하자면 덕과 행복의 일치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최고는 최상(最上)을 의미할 수도 있고, 완벽(完璧)을 의미할 수도 있다.” 최고선이 되기 위한 첫 단계는 최상선을 이루는 것이다. 바로 덕을 성취하는 것이 최상선이다. 덕을 성취하는 것이 일단 도덕의 목표이고 덕을 성취하게 되면 최상선에 도달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최고선에 도달했다고 할 수 없다. 덕에 의해 도덕적으로 행위하는 사람에게 행복까지 따라 올 때 그야말로 제대로 된 완벽한 선이 실현되어 최고선이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행복을 선의 중요한 요소로서 고수한다. 하지만 칸트는 도덕의 원천을 행복에서 찾는 것은 아니다. 최상선은 행복이 아니라 도덕성으로서의 덕이다. 더 나아가 도덕성과 행복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도덕적 인간은 행복할 가치가 있으나. 실제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결국 행복이 행복할 가치와 필연적으로 비례하여 존재하는 것은 아니므로, 덕은 최상선을 의미할 뿐 완전한 선, 즉 최고선까지 의미하는 않는다. 최고선은 행복과 도덕성이 일치하는데서 성립한다. 즉 도덕적으로 가장 완전한 의지가 최고의 행복과 결합하여 이 세상 모든 행복의 원인을 이루는 지성의 이념이다. 완전한 선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행복할 가치가 있는 행동을 한 사람이 행복을 맞이할 기대를 가져야만 한다.
다소 어려운 말을 인용하였는데 결국 최고의 선은 도덕적으로 정당한 행복이라고 하겠다. 즉, 우리가 하고 싶은 게임을 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행복감을 느끼지만 이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거나 의미있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도덕적으로 바람직스럽고 칭찬받을 일을 한다고 해서 꼭 행복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칸트의 말을 곰곰히 반추해보면 우리가 도덕적행위를 하면서 행복감을 느끼거나,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를 할때 그것이 도덕적으로 옳고 바람직스러운 행위라면 궁극적인 선한 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같은 범부가 살아가는데 굳이 최고선을 거들먹거릴 이유는 딱히 없다. 다만 궁극의 최고선이 무엇일까해서 알아보니 칸트라는 엄청난 최고선을 설파한 대가가 있었다.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앞으로의 나의 살아갈 날에 악을 행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바람직스럽고 행복한 일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