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신자유주의가 풍미하고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 무엇이냐고 물어 보면 정확하게 그 개념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아 보인다. 심지어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란 책을 읽어 보아도 신자유주의 현상과 폐해에 대해 장황히 설명해 놓았을 뿐, 정작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 설명은 잘 보이지 않는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영역에서 신자유주의 이념과 정책들이 광범위하게 지배하고 집행되고 있어서 일부 사람들은 "나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한다."고 선언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무슨 대단한 진보주의자나 되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면 도대체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신자유주의라고 하니 그전에 구자유주의 내지 오리지널 자유주의가 존재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 신자유주의 이전에 자유주의가 존재했다. 우리는 이를 고전적 자유주의라고 부른다. 최초에 자유주의를 부르짖은 사람은 영국의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다. 아담 스미스가 경제학의 비조이니 자유주의란 말은 경제학용어다. 적어도 신자유주의의 선조인 자유주의는 경제학용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유주의라고 하니 전체주의 내지 독재주의의 대립개념으로 보고 이를 정치학 내지 사회학 용어가 아니가 착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용어상의 혼용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더 어렵게 한 것도 사실이다. 물론 아담 스미스가 경제학자이기 이전에 도덕철학자이긴 했지만....
아담 스미스가 살았던 시기는 18세기로 이 때는 바야흐로 자본주의가 막 출현하려고 할 때다. 이 때는 봉건계급과 중상주의자들이 신흥자본가와 자영업자-소위 부르주아들의 투자와 영업을 통제하고 있었다 . 당시의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경쟁이라는 요소가 아니라 전통적 통제였다. 아담 스미스로부터 존 스튜어트 밀에 이르는 소위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철폐시키코자 했던 대상이 바로 그러한 봉건적.중상주의적 통제였다. 그들과 이후의 자유주의자들이 소위 야경국가론을 부르짖으며 자유방임론을 옹오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담 스미스가 주장한 "보이지 않는 손"은 자유경쟁시장의 이상을 보여주는 극치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극성기에 들어서면서 부르주아들(아니 독점 자본가계급이라고 해야 맞겠다.) 스스로가 시장의 통제자가 되어 버렸다. 그러면서 1929년의 대공황이 일어났다. 또 한편에서는 자본주의의 폐지를 주장하는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의 새로운 대안으로 등장하였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국가의 개입을 불러오게 되고 중대한 변화를 겪게 되는 소위 "수정자본주의"시대를 맞게 되는 것이다. 이 때의 주류 경제학이 케인즈를 필두로 하는 케인즈학파이다. 이는 정부의 인위적인 개입에 의한 유효수요 창출로 불황을 극복한다는 이론이다. 말하자면 자본 및 자본가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통제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케인즈주의는 투자와 기업경영에 관한 개인의 자유로운 결정을 인정하면서도 국가가 신용.통화.금융기관의 감독. 다양한 규제와 정책을 통해 경제활동과 성장의 수준을 통제하고 경제 상황에 따라 정부지출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총수요와 총생산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이런 자본 및 자본가에 대한 통제를 반대하는데 이는 이전의 고전적 자유주의의 재탕이라고 볼 수 있으니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면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시작되었고 왜 현대의 주류이념이 되었나?
공황의 극복과 2차세계대전의 발발로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확대되었고 일상화되었다. 특히 전쟁기간 동안 국가가 임의로 자원을 배분하는 일은 불가피했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문제는 1945년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전쟁기간 중에 확대된 국가 개입은 거의 축소되거나 폐지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황과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한시적 조치로 받아들여졌던 국가개입이 이제 당연하고 일상적인 일이 된 것이다.
여기에 소련이 영향으로 동유럽이 모두 공산주의권으로 들어 가고 아시아의 가장 큰 나라인 중국마저 붉은 깃발아래 묻힐 판국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주의 국가들-신자유주의자들의 표현에 의하면 자유주의 진영은 단결하여 사회주의의 확산에 적극 대처해야 옳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전후 영국 총선에서 2차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웅인 보수당의 처칠이 참패하고 애틀리의 노동당이 압승하는가 하면 프랑스에서도 공산당이 제1당이 되기도 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자유주의 경제학자인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 1899~1992)이다. 하이에크는 1947년 4월20일(이 날은 부활절이었다고 한다. 자유주의의 부활을 외치는 상징적인 날이다.) 스위스 제네바호수 부근의 몽펠르랭이라는 작은 마을에 자신과 학문적. 철학적.이념적으로 뜻을 같이 하는 미국과 유럽의 경제학자.정치학자.사회학자 39명을 초청하여 몽펠르랭협회를 창립한다. 신자유주의 이념이 세상에 등장한 것이다. (한국에도 이 신자유주의의 비조 이름을 딴 Hayek Society란 이름의 신자유주의자 지식인 단체가 있다.)
일찌기 하이에크는 그의 저서 "노예에의 길(The road to serfdom)"에서 "어떤 민주주의 사회일지라도 일단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 개입을 용인하기 시작하면 전체주의로 변하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국가에 의한 개인의 자유의 억압이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므로 오늘날 신자유주의 이론이 사회전반에 보편적으로 퍼져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어째서 신자유주의가 이 시대의 주류 경제이론이 되었나? 사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과 유럽은 공전의 경제호황을 맞이하게 된다. 마셜플랜에 의한 대규모 유럽 복구지원 원조로 인해 유럽의 생산력이 급격히 회복되고 아시아의 일본 역시 같은 경험을 하게된다. 하지만 60년대 중반부터 미국이 베트남에 참전하면서 엄청난 인적.물적 손실을 입게 되고 유럽도 성장의 피로감을 느끼며 기업이윤이 지속적으로 감소한다. 1974년의 오일쑈크가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OPEC(Organization of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이 1974년 1월 1일을 기해 원유의 가격을 배럴당 평균 3달러에서 12달러로 급격히 인상시켰다. 이는 저유가에 의존해 있던 경제에 엄청난 비용인상(cost-push) 요인으로 작용하였고 가뜩이나 체질이 허약해 있던 세계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결국 세계경제는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을 겪게 된다. 경제이론에 따르면 경기가 불황이면 물가가 내려가는 deflation과 호황이면 가격이 올라가는 inflation만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제 불황임에도 물가가 올라가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스태그플레이션때문이라고는 말 할 수 없지만 그때까지의 주류경제이론이었던 케인즈주의 이론으로는 이 불황을 설명하고 해결할 방법이 없어 안타깝게도 케인즈이론은 용도폐기되었다. 이제 신자유주의가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하이에크가 소집한 몽펠르랭회의에 소장학자로 말석을 차지했던 밀턴 프리드만(Milton Friedman, 1912~2006)은 하이에크의 주장을 경제학적으로 이론화했다. 프리드만은 통화주의자로 통화의 공급은 GNP성장율 만큼만 증가시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만큼 정부의 사장개입을 줄이고 그 역할을 최소화하여 시장의 자율기능에 맡기면 된다는 것이다.
프리드만은 개인의 자유와 복지를 증진시키는 데에 있어 자유경쟁을 근간으로 하는 경쟁적 자본주의체제가 인류가 고안해 낸 가장 훌륭한 제도이며, 따라서 보다 나은 사회를 건설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모든 이에게 최대한의 경제적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위하여 사유재산권을 존중하고 모든 이에게 공평한 기회를 보장하며 공정하고도 치열한 경쟁이 이뤄지도록 하는 동시에 정부의 영역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1930년대 공황이 연방준비은행의 서투른 통화정책 때문에 발생하였다고 진단함으로써 케인즈와 반대적인 입장을 취한다.
하이에크와 프리드만의 이론과 정책은 1980년대 미국과 영국의 레이건, 대처에 의해 착실히 수행되었다. 작은 정부, 공급중시경제이론, 세계화, 자본의 자유로운 국제이동 등이 일정 부분 경제회생에 역할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신자류주의정책이 시행되는 동안 사회주의제국 소련이 붕괴하고 중국마저 겉만 붉은 자본주의 대국이 되었다. 이제 신자유주의는 천하무적이 된 것일까?
하지만 세계화와 자본의 과도한 이동은 세계경제의 변동성증가와 소위 생산자본보다는 금융자본의 투기이익을 극대화하여 2008년의 금융위기를 불러왔고 아직도 세계 경제를 불황속에 허우적 거리게 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소득불평등의 심화다.미국에서 최고경영자 1명의 봉급을 지불하기 위해서 1970년에는 30명의 노동자가 필요했으나 2000년에는 그 수가 무려 500명으로 증가했다. 경제계만 이런 것이 아니다. 메이저리그 최고대우를 받는 선수의 연봉이 1970년대에는 미국 평균 노동자 봉급의 25배정도에 불과 했으나 이제는 250배가 되었다. 얼마전 음악계에 있는 인사를 만났는데 일급연주자의 출연료와 무명의 출연료 차이는 상상을 초월한다고 한다. 더 이상의 언급은 무의미하리라. 최고만이 대접받고 2등이하는 패자가 되는 사회가 진정으로 우리가 원하는 사회인가?
다음은 부와 지위의 대물림이다. 엄청난 소득 격차는 그 보다 훨씬 심한 부의 차이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부란 축적된 소득이기에 시간이 갈수록 그 축적된 차이는 갈수록 커질것이다. 하물며 일상의 소득이 일상의 소비를 하회하는 서민들과 가계부채에 허덕이는 중산층을 생각해 보면 자명한 일이다.
불황이 일상화되고 소득불평등이 심화되어 빈민층.저소득층이 늘어나게 되었다. 여기에 과학과 의료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자들의 바람과 의도와는 반대로 정부의 경제.사회에 대한 개입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선진국 대부분에서 정부부채가 GDP의 100%를 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작금의 한국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나 협동조합주의가 대안이 될 것인가?
필자가 보기에는 아닌 것 같다. 어려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