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었을 때 읽고 가슴이 뛰었던 책의 제목이다.
전후 일본의 인기있던 작가였던 미시마 유끼오의 책이다. 낭만주의 문학가였으나 어렸을 적 무사집안 출신이었던 할머니의 영향으로 무사도의 부활을 주장하고 제국주의. 군국주의 일본의 재건을 부르짖으며 장렬히 할복했던 사람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부활은 워낙 우리의 깊은 상처를 건드리는 것이라 별로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긴 하다. 하지만 미시마의 주장은 단순하고 직선적이어서 매력이 있다.
긴 인생을 축약하는 것은 찰라의 행동이다. 그것이 어떤 행동인가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진정한 인생의 의미는 짧은 시간의 의미있는 행동으로 보인다. 이는 특정한 시점의 중대한 결심이나 결정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그 행동이나 결정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우리가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고 기리는 것은 하얼삔 역두에서 이등박문을 쏘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도 우리는 안중근이 천수를 누리고 평안히 눈을 감았다고 하드래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그 이후의 안중근의 생은 의미가 없다.
백천간두에서 한발을 더 내디딜려고 하는 그 행동(백척간두진일보), 혹은 절벽끝에 매달려 있을 때 그 잡고 있는 손을 놓아 버릴 수 있는 행동(현애철수장부아)에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며 이는 그 자체로 생의 가장 찬란한 순간이며 의미가 된다. 그래서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어느 여류작가가 50대 중반 이후의 남자는 별볼일 없다고 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부시시한 머리, 쾡한 눈, 우글쭈글한 피부와 남자로서의 매력을 상실한 육체. 그 위에 이제까지 살아 온 자신의 행동행태와 사고방식만이 옳은 것이라고 강변하는 중늙은이는 부인과 자식들에게는 의미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사회적으로는 무의미한 존재다. 아니 자신도 그 무의미함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개개인의 생은 모두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어야 한다. 젊어서 그냥 인생을 탕진하거나 낭비하고 중년에는 먹고살고 자식키우느라 아득바득 살아왔다면 이제 노년이 되어 생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바야흐로 노인들이 득시글거리는 초고령화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노인들이 이 세상의 짐이 되어서는 희망이 없다. 행동은 팔팔한 젊은이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평가와 속물들의 주장에 주눅들 필요는 없다. 필자처럼 허망하게 인생을 살아 온 사람들은 노령기에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한다. 이제 우리들이 행동에 나설 때다.